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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ㆍ이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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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버스투어  0 Comments  1,395 Views  20-03-1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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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대풍가 부른 '오목대'




태조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오목대(梧木臺)이며, 오목대와 연결되어 있는 구름다리를 따라 내려가면 이목대(梨木臺)가 나온다.


고려말(우왕)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왜구를 전멸시키고 승리감을 만끽한 이성계는 개성으로 가는 도중 길목에 있는 오목대에서 전주이씨 종친들을 불러 모아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집안 어르신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며, 발밑에 널리 펼쳐진 전주시가지를 보며, 호탕한 모습으로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다고 한다. 즉 자신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넌지시 비쳤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발호하던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道)의 무리를 정벌하고,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여 개경으로 돌아갈 때 전주의 이곳에서 야연(野宴)을 베풀었다는 곳이다. 여기에서 이성계는 대풍가를 읊었다.


즉 자신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넌지시 비쳤다. 그러자 이를 모를리 없는 종사관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홀로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비분강개한 마음을 시로 읊었다. 현재만경대에는 그 시가 새겨져 있다.


오목대와 이목대에는 고종의 친필로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고, 비각이 건립되어 있다.


대풍가(大風歌)
大風起兮雲飛揚 센 바람 이 부니 구름이 높날리네.
威加海內兮歸故鄕 위엄을 해내에 더하고 고향으로 돌 아가네.
安得猛士兮守四方 어떻게 용맹한 군사들을 얻어 사방을 지킬까



누각 왼편에는 1900년(광무 4) 고종의 친필로 세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조선을 창업한 태조께서 말을 멈추고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비각이 있다.


전주의 오목대는 조선의 역대 왕들에게는 기개를 아로새겨주는 일종의 모태였던 셈이다. ‘자만금표’라는 표석이 있다. 왕조가 살었던 곳이므로 아무나 이곳에 출입을 할 수 없다는 표시다. 왕가를 일으킨 마을 주민들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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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쉼터 ‘500년 당산나무’
한옥마을 은행로에 6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면 오목대에는 500년 세월을 한옥마을과 함께 한 느티나무가 있다. 오목대 탐방로에 우뚝 선 500년 된 느티나무는 전주한옥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온 당산나무이다.

 

주민의 무병과 평온무사를 기원하는 당산제가 매년 음력 1월15일 이곳에서 열린다. 최근에는 전주한옥마을을 찾는 젊은 연인들이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이곳 ‘500년 당산나무’를 찾고 있다.



오목대 길
전주 한옥마을의 전경을 담고자 한다면, 오목대 길을 적극 추천한다. 향교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한옥마을의 전체적인 풍경을 볼 수 있는 언덕으로 갈 수 있다.


언덕을 둘러싸고 있는 둘레길을 따라 약 1~3분 정도만 걷다 보면, 전주청연루를 배경으로 한옥마을의 또 다른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오목대 길에서 촬영할 때 드리는 꿀 팀은 피사체를 지면보다 높은 곳에 이동시켜 하늘과 한옥마을의 모습을 비슷한 비율로 담아 촬영하는 걸 추천한다.



완산구 교동 산1-11
전주시 전라북도 완산구 교동 산1-11,완산구 기린대로 55




전주이씨들이 살았던 '이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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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기린대로로 오목대와 이목대(梨木臺, 지방기념물 16호)로 나뉘어져 있지만, 원래는 ‘자만동(滋蔓洞)’으로 같은 동네이다. 1930년대 전라선 철도가 지나가면서 맥이 끊어졌고, 철로가 이사 간 이 후 기린대로가 생겼다.


자만동은 전주이씨가 자리를 잡고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趾)라는 비각이 서 있다. “목조대왕이 전에 살았던 터”라는 뜻이다. 현재의 비각은 철로가 철거되고 기린로가 뚫리면서 주택가 쪽으로 약간 이전된 것이다.



이안사와 얽힌 재미난 일화가 전하고 있다.
이목대는 19세기의 ≪완산지≫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으나, 목조 이안사에 관한 장군수(將軍樹)와 호운석(虎隕石)에 관한 설화는 18세기말의 '완산지'에 등장하고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장군수는 발산 아래에 있었는데, 이안사가 어렸을 때 여러 아이들과 이 나무 밑에서 진법을 익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나무를 장군수라 하였으며, 지금은 나무가 없지만 그 유지는 완연히 남아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호운석은 한벽당 앞 1리쯤에 있는데, 전해오는 말에 이안사가 어릴 때 여러 아이들과 발산 남쪽 기슭에서 놀다가 폭풍우를 만나 바위 아래로 피하였는데 큰 호랑이가 앞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안사가 여러 아이들에게, 호랑이가 여러 사람을 동시에 해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단지 한 사람만 살상할 것이니 누가 희생물이 될 것인지 옷을 던져 시험해보자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아이들이 네가 제일 나이가 많으니 먼저 옷을 던지라 하였다.

이안사가 옷을 던지자 호랑이가 그 옷을 찢자 여러 아이들이 이안사를 밀어내었다. 그러자 호랑이가 도망쳐 달아났으며, 이 때 갑자가 언덕이 무너져 내려 여러 아이들이 모두 깔려 죽었으나, 이안사만은 살아날 수 있었다. 그 돌이 물 가운데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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