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의 상징 ‘경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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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이버스투어 댓글 0건 조회 10,578회 작성일 19-07-23 16:44본문
전주 한옥마을의 상징 ‘경기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에 있는 조선전기 제1대 태조의 어진을 모신 사당. 묘사(廟祠). 사적
전주한옥마을 여행은 태조로를 걷는 데서 시작한다. 태조로는 풍남문에서 오목대 방면 약 550m 도로다. 한옥마을의 가장 큰 길이자 경기전과 전동성당이 조선의 시간을 잇는다.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경 개선 길에 들려 잔치를 베풀었다는 곳이다.
새 나라 개국의 꿈을 중국 한고조 유방의 대풍가를 통해 호기롭게 불렀다고 전해지는 이곳은 함께 길을 동행했던 포은 정몽주와 갈라서게 된 역사적장소이기도 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 창건되었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보물 제931호인 이성계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 등의 유적이 있다.
경기전은 왕조의 발상지라 여기는 전주에 세운 전각으로 세종 때 붙인 이름이다.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14년(광해군6)에 중건하였다. 보호면적은 49,590㎡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산,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졌던 어진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면서 다시 돌아왔다가 동학혁명 때 위봉산성으로 옮겨져 화를 면했으며 현재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어진은 1872년 서울 영희전의 영정을 모본으로 해서 새로 그린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 입구에 있으며 한옥마을을 찾은 여행객이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곳으로 원래의 규모는 훨씬 컸으나 일제시대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간 것이다.
남아 있는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 본전 가운데에서 달아낸 헌(軒), 본전 양 옆 익랑(翼廊)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두르고 있는 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있다.
본전은 남향한 다포식(多包式) 맞배집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세웠는데 건물 안의 세번째 기둥렬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았다.
이 단 양 옆에는 일산(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웠다. 본전 앞에 내단 헌은 본전보다 한 단 낮게 쌓은 석축 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二翼工式) 포작(包作)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전과 헌이 이루는 구성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려고 세운 정자각(丁字閣)의 구성과 같다. 또한, 본전 양 옆에는 익랑(翼廊: 문의 좌우편에 잇대어 지은 행랑) 2칸, 무(廡: 전각 주위에 세운 행랑) 4칸이 있다. 내삼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3문으로 그 양 옆에 익랑 2칸을 두었다.
외삼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익랑을 두지 않았으며, 옆면 가운데에 사이기둥을 세워 삼문을 달았다.
현재 이곳에 있는 태조 어진은 1442년에 그린 것을 1872년(고종 9)에 고쳐 그린 것이다. 경기전은 그 주변 일대와 더불어 사적으로 지정된 외에 경기전 정전은 보물 제1578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과 함께 전주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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