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달이 아름다운 절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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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이버스투어 댓글 0건 조회 12,916회 작성일 19-04-24 13:38본문
다섯 봉우리가 연꽃무늬를 만든다는 오대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월정사를 찾아가는 길은 하늘로 곧게 뻗은 전나무 숲이 원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한국전쟁 때 깡그리 불타버리고 역사의 흔적으로 남은 것은 별로 없는데, 한국불교연구원이 발행한 『월정사』에서는 월정사라는 명칭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사승(寺僧)의 말에 따르면 오대산 동대에 해당하는 만월산 아래 세운 수정암이 훗날 월정사가 되었다.
월정사(月精寺)의 ‘월’ 자와 만월산(滿月山)의 ‘월’ 자를 연관시킨 이러한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 「강릉 불우(佛宇)」조에는 월정사와 수정암이 별개의 사찰로 기록되어 있어 사승의 이 같은 이야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화마로 손실된 월정사에는 옛날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 유적이 흔하지 않다.
적광전 앞 중앙에 서 있는 팔각구층석탑과 그 탑 앞에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양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석조보살좌상뿐이다.
월정사는 산내암자인 상원사를 비롯해 8개의 암자와 64개의 말사, 구불하게 이어지는 전나무숲길까지 포함해 우리나라 사찰 중에 가장 너른 땅을 소유하고 있다.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성산聖山으로, 산 전체가 불교성지가 되는 곳은 남한에서는 오대산이 유일하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창건된다. 자장은 중국으로 유학하여 산서성 오대산의 태화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이때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전해준 뒤, 신라에서도 오대산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주게 된다.
이후 귀국하여 찾게 된 곳이 강원도 오대산이며, 이때 월정사를 창건하고 오대 중 중대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조성하게 된다.
월정사는 해방을 전후해서 종정(교정)을 4번이나 역임하신 한암스님께서 주석하시며, 승가오칙僧伽五則 통한 청정한 기상을 진작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월정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의 위상을 확립하고, 동국대학교 건립을 주도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1.4후퇴 과정 중에, 아군에 의해 월정사를 비롯한 오대산의 암자들이 전소되면서, 오대산은 개산開山 이래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럼에도 화엄학의 대가이며, 불교경전은 물론 동양사상 전반을 아우른 탄허스님께서 주석하시며 월정사는 점차 추슬러진다.
이때 탄허스님의 제자 만화스님이 현 적광전을 중건하고, 이후 현해스님이 대법륜전을 건립한다. 그리고 현 주지인 정념스님에 의한 각고의 노력으로, 가람이 일신되면서 오대산의 성세가 재현되기에 이른다.
현재 남은 건물은 모든 한국전쟁 이후 재건된 것이지만 오대산의 푸른 기운을 한 곳으로 모으는 듯 한 사찰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은 품위와 기개가 느껴진다.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이어간 조선의 임금 세조는 하늘의 벌을 씻어내기 위함인지 불교에 귀의하고 월정사를 수시로 찾아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였다고 한다.
팔각구층석탑(八角九層石塔ㆍ고려시대 초기 10세기경ㆍ국보 제48호)
월정사의 본당인 적광전의 앞뜰 중앙에서 조금 비껴난 자리에 팔각구층석탑이 서 있다. 팔각구층석탑은 자장율사가 건립했다고 전해오지만 고려 양식의 팔각구층석탑을 방형 중심의 3층 또는 5층이 대부분이었던 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고, 고려 말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자장율사가 월정사를 세웠다는 『월정사중건사적비』(이휘진, 1752년)의 기록이 있는데도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고려시대에 와서야 다각다층석탑이 보편적으로 제작되었으며, 하층 기단에 안상(眼象)과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층 기단과 괴임돌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만주를 비롯한 북쪽 지방뿐 아니라 묘향산 보현사에 팔각십삼층석탑이 있고 여러 곳에 팔각다층탑이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으며, 탑의 양식으로 보아 탑을 세웠던 때를 아무리 올려도 10세기 이전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것 같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한국전쟁 때 석재가 파손되고 기울었던 것을 1970년과 1971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복원 당시 진신사리와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연대를 확인할 수 있을 만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탑의 높이는 약 15.2미터로, 다각다층석탑으로는 가장 높다.
아래위로 알맞은 균형을 보이며, 각부에 확실하고 안정감 있는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다각다층석탑의 대표가 될 만하다고 여겨져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었다.
팔각구층석탑은 연꽃무늬로 치장한 이층 기단과 균등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그리고 완벽한 형태의 금동장식으로 장엄한 상륜부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뛰어난 석탑이다.
이 탑은 전체를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상륜부에 일부 금동장식을 더하였는데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부분이 더러 있으나 오늘날까지도 본래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다. 기단은 아래층 각 면에 안상을 새기고 연꽃 장식을 베풀었다.
그 위로는 굄돌을 놓아 위층 기단을 정성스레 받들어 기단 전체가 마치 부처님의 연꽃 대좌처럼 장식되었다.
그 위에 탑신을 받았으니 탑신은 곧 부처님이다. 탑신 안에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으니 불사리는 부처님의 진신이나 다를 바 없고 그러한 진신의 부처님이 연꽃 대좌 모양의 기단 위에 계신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기단 위에는 부처님을 앉히기 위한 방석과 같은 석재를 별도로 끼웠으며 탑 앞의 석조보살 좌상도 부처님과 같은 탑 앞에서 공양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탑신은 각 층마다 줄어듦이 적고 층수는 구층을 헤아려 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팔각은 불교의 실천수행에 기본이 되는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지고 일층의 사면에는 네모난 감실이 하나씩 있는데, 남면의 감실이 가장 크며 문틀을 단 흔적도 있다.
몸돌은 모서리마다 귀기둥이 새겨지고 끝은 밑면이 수평이고 위는 곡면으로 처리하여 추녀 끝이 살짝 위로 솟아 가뜬해 보이며 추녀 끝마다 풍탁이 달려 탑은 언제나 바람의 향기를 음미한다.
흐트러짐이 없는 정연한 상륜은 보탑의 격조를 한층 더하여 주며, 여기에 금동장식을 더하여 탑 위에 보관을 얹은 듯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하여 보탑의 절정부는 세련된 조형미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하여 1970년 해체보수를 통하여 1층 2층 6층 9층을 새 돌로 갈았으며 그 당시에 1층과 5층에서 총 12점의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은제의 불상 1구와 4점의 청동 거울, 금동 향합과 향주머니, 진신사리경 등의 총 12점의 유물들은 2003년 6월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또한 2000년 8월 월정사석조보살좌상 보수공사 시에 지하 1m 아래에서 탑의 기단부로 보이는 또 하나의 유구가 발견이 되어 학계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팔각구층석탑은 높이 15.2m로 우리나라의 팔각석탑으로는 가장 크다. 그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서도 단연 으뜸이며 고려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주목받고 있다.
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ㆍ좌상의 전체 높이는 1.8미터ㆍ국보 제48-2호)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팔각구층석탑 앞에는 탑을 향하여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공양을 드리는 모습을 한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입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 보살상을 일명 약왕보살藥王菩薩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된 이 보살상은 턱이 약간 길고 눈두덩이 두껍고 뺨은 도톰하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어 복스럽게 느껴진다.
머리 위에 높다란 원통형 관을 쓰고 있는데 관 옆에 작은 구멍이 얕게 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에 장식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발寶髮은 양 어깨의 앞과 뒤로 단정하게 드리워져 있고, 두 귀는 보발 등으로 살짝 감추어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기고 앞가슴은 영락으로 장엄한 채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아 무엇을 잡고 있는 듯 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석조보살좌상 복제
이 보살은 탑을 향하여 한가운데가 아닌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앉아 있고, 상체가 하체에 견주어 큰데 이것은 우리 눈의 착시현상을 감안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것은 고대 인도의 관습에 따라 자신을 낮추고 스승에게 최상의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보살상이 약왕보살임은 법화경에 잘 나와 있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는 과거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희견보살喜見菩薩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현일체색신삼매炫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
환희심에 가득한 보살은 여러 가지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천이백 년 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일월정명덕국日月淨明德國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일월정명덕여래는 그가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다. 그러고도 모자라 탑 앞에서 자신을 두 팔을 태우며 칠만 이천 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약왕보살이다.
월정사 부도(浮圖ㆍ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42호)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다가 오백 미터쯤 되는 곳에 부도 밭이 있다. 이 부도들은 스님의 묘탑으로서 모두 스물 세기가 있다. 불가에서는 스님이 입적하면 화장을 하는데 이때 평소 정진한 기운과 불이 어우러져 사리라는 결정체가 남는다. 부도는 이 사리를 모신 곳이다.
부도는 부도浮圖, 부두浮頭 불도佛圖등으로 표기되고, 그 어원은 붓다Buddha에서 유래한다. 즉 부처님처럼 추앙받는 스님을 또 다른 붓다란 하였고 그러한 스님의 탑 또한 생사를 초월한 붓다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붓다는 세월이 흐르면서 부도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 의미는 탑을 지칭하게 되었다.
건립 연대가 확실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부도는 염거화상탑-국립중앙박물관 소장-으로 우리나라 석조 부도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신라시대에 건립된 부도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 기본이고 9세기 후반에 많이 건립되었다.
월정사 부도는 원탑형의 부도도 있으나 대부분이 석종형石鐘形을 하고 있다. 석종형 부도는 부도의 겉모양이 종과 비슷한 데서 생긴 이름이다.
이러한 석종형 부도는 고려 말 이후부터 조선시대에 많이 세워졌고 그 시원始原은 통일신라 하대인 9세기로 본다.
이중 기단과 옥개를 갖춘 혼합형 부도도 있는데, 석제는 대개 화강암이고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모습이 선사들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
부도 밭은 산책하며 명상에 잠기기 좋은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으며, 앞쪽의 오대천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현재 월정사는 명상마을과 성보박물관 등을 전통사찰의 영역 밖에 새롭게 조성하면서, 2018평창 동계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전개하는 메카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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